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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소통

양승태 대법원장의 구속과 인혁당 사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1-28 14:06
조회
39
"박정희가 쓴 수법을 박근혜가 이어 받았다"

놀랍다.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가 구속되고, 전직 대통령인 이명박도 구속되었다. 이제 사법부의 최고 수장인 양승태 대법원장마저 구속되어 대한민국의 적폐청산, 씻김굿은 그 정점에 달한 듯하다. 여러 혐의가 있지만,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독재자인 아버지 박정희가 사법부를 조종해서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압살하던 수법을 곁에서 지켜보며 못된 짓을 습득한 박근혜가, 아버지가 했던 방식 그대로 자신의 복심을 대법원장에 임명한 후에 자기 마음대로 사법부를 조종하려 했으며, 꼭두각시 양승태는 박근혜의 뜻에 따라 사법부를 농락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무소불위, 황제보다도 더 큰 권력을 휘둘렀던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는 3권(행정.입법,사법)분립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사법부를 시켜 어떤 짓을 했을까?

박정희가 판사들을 시종처럼 부리면서 저지른 패악질들이야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극악했던 행위가 중앙정보부를 시켜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후에 무고한 8명을 전격적으로 사형시켜 버린 일이다. 인혁당 사건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다음: 네이버 지식인, 들꽃님의 블로그, 나무위키, 국민일보에서 인용 및 편집)

<1차 인혁당 사건>

한일회담, 대일 굴욕외교에 대한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었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을 적발했다며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한 사건이다. 1965년 1월 열린 1심에서 기소된 13명 가운데 2명은 징역형,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6월 열린 2심은 전원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같은 해 9월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확정했지만, 사형이나 중형이 선고되지는 않았다.

<2차 인혁당 사건(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원회(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2차 인혁당 사건은 유신 반대 시위가 확산되던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 조종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지목한 사건이다.

유신 독재 치하였던 1973년 8월 8일 박정희의 밀명을 받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의해 자행된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9월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점차 반독재, 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파급, 확대되었으며, 일부 야당인사들,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민주주의의 회복 및 공화당 정권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운동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되었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 인혁당 재건위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하였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후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하였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180명을 구속·기소하였다. 기소장에 의하면, 이들은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 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이 발생하면서, 도예종 등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금하여 다시 수사하였다. 5월 27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추가 발표를 하면서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하며, 도예종, 여정남 등 23명에 대해서는 내란 예비와 음모 등의 혐의를 추가하여 기소하였다.

1974년 7월 11일에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7월 8일 군 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8명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태환, 유진곤, 전창일, 이성재,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에 대해서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민청학련 사건 주요 관련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선고 10년, 복역 1년)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기소유예)

김근태 전 참여정부 복지부 장관(배후조종 혐의로 수배)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배후조종 혐의로 수배)
장영달 전 의원(선고 7년, 복역 7년)
유인태 전 의원(사형선고, 4년 복역)
이 철 희망레일 이사장, 전 철도공사 사장(사형선고, 1년 복역)

정찬용 참여정부 인사수석, 이상수 전 의원, 이강철, 황인성 참여정부 시민사회수석, 강창일 현 의원, 이재웅 전 의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등

그해 9월 7일에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도 도예종 등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정만진, 이재형, 조만호, 김종대 등 4명에게는 징역 20년, 전재권, 황현승, 이창복, 임구호 등 4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를 기각하여 이들의 형량을 확정하였다.

이들 인혁당 연루자들은 수사 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피고인석에 자리했던 피해자들 중 8인의 사형수 중 한 명이었던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혁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라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1975년 4월 9일에 8명에 대한 사형이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되었다. 당시 이들의 선고통지서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기 전에 군 검찰에 접수되었으며, 서울구치소에서도 선고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했다는 정황이 문서로 드러났다.

희생당한 사형수 8인의 명단, 프로필의 직업은 체포 당시 기준

•서도원(徐道源, 1923년 3월 28일 생, 당시 나이 52세,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都禮鍾, 1924년 12월 25일 생, 당시 나이 50세, 삼화토건 회장)

•송상진(宋相振, 1928년 10월 30일 생, 당시 나이 46세, 양봉업)

•우홍선(禹洪善, 1930년 3월 6일 생, 당시 나이 45세,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하재완(河在完, 1932년 1월 10일 생, 당시 나이 43세, 건축업)

•김용원(金鏞元, 1935년 11월 10일 생, 당시 나이 39세,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생, 당시 나이 38세, 삼락일어학원 강사)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생, 당시 나이 31세,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유신 정권은 사형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려하지 않았으며,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해 버렸다. 고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던 데다, 유족들이 한데 모여 억울한 죽음을 호소할까 봐 그랬다고도 한다. 이 중 우홍선, 이수병 씨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수됐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바로 인수되지 못했다. 이때 경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은 시신들을 빼앗기고 남은 송상진 씨 시신만이라도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렸다.

국제엠네스티는 다음날인 4월 10일에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도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사법 살인’이라며,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른바 유신정권에 의한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군사정권 시대에 국가의 폭력으로 발생한 의문사 사건들을 밝히기 위해 2000년 10월에 대통령 직속기구로 구성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해 2002년 9월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해 12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법에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였다. 이에 재조사가 이루어져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민청학련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하였고,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리고 2008년 1월 23일과 9월 18일에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되었고,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 판결이 되었다.

또 2010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관련자와 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국가가 60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정부는 부당이득금 청구소송을 조금씩 진행하여 국가가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배상금을 너무 주었으니 돌려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진행했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연이어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는 중이다.

2011년부터 천인공노할 이명박 정부가 부당 이득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면서 무려 210억에 달하는 소송이 제기되었고 피고인(관련자와 가족들) 측이 모두 패소했다. 더욱 황당한 건 이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중앙정보부의 후신)이 소송 주체로서 피해자들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 투옥 피해자는 지급된 배상금을 모두 채무 변제와 일부 기부로 다 지출한 탓에 소송 패소로 국정원 측에서 집의 모든 가재도구에 가압류를 걸었으며, 다른 피해자 가족은 오랫동안 거처한 집을 압류로 빼앗길 처지에 내몰렸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난 이상 법적인 구제 방법은 없었고, 오직 대통령의 지시로 압류 집행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아비 박정희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에 대해 조금이라도 양심적 가책을 느껴야 마땅한 박근혜 정부 측은 법과 원칙을 내세워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를 거절하여, 피해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 주었으니, 박근혜가 탄핵이 되고, 지금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다 부녀 2대에 걸친 악업에 대한 업보라고 할 것이다. 인혁당 사건에서 죄 없이 죽어간 8명의 한이 하늘에 까지 닿았다.

그 다음 문재인 정부 역시 “딱한 사정은 알고 있다. 해결 방안을 검토해보겠다”는 원론적 수준의 대답만 나온 상황이지만, 그러나 다행히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에서 과거사 피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인혁당 사건 유족들도 배상금 반환과 관련된 재심을 청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기한 내용에 비추어 보면, 1심과 2심은 긴급조치에 의해 설립된 군법회의에서 판결이 났으므로 논외로 친다고 해도,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은 일반 대법관들[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 이들 중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하여 반대의견을 냈다.]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선고통지서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기 전에 군 검찰에 접수된 사실로 판단하건데, 그 당시 대법원의 대법관들은 박정희의 개가 되어 박정희가 시키는 대로 판결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구치소에 사형선고 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사실로 볼 때(보통의 경우 몇 달 후에, 혹은 몇 년 후에서야 사형이 집행되고, 최근에는 사형수에게 사형이 집행된 바 없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선량한 국민을 향해 얼마나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알 수 있다. 박정희가 부하인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던 것은 혹 무고하게 살해된 이들 8명의 저주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치하에서는 이루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만행이 자행되었다. 3인 이상이 모일 때는 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여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박정희 자신은 물론, 국가의 어떠한 정책에 대해 비판할 때는 무조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필자 개인에게도 이에 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유신독재 치하 당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원의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박정희 정권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망한다. 포도를 심으라고 하면 누구나 다 포도를 심게 되어 망하게 되고, 사과를 심으라 하면 또 누구나 다 사과를 심게 되어 망하게 되니 정부에서 하라는 반대로 해야지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는데, 수업을 받던 학생이 정권의 나팔수였던 방송을 통해 세뇌 받은 대로 이를 신고하였다. 결국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무려 5년형을 받았다. 최종 형은 어찌 받았는지를 알 수가 없으나, 지방법원의 방청석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목격한 사건이다.

그랬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의 군사독재 정권에서, 그리고 뒤이은 박정희 아류 정권인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그리고 이들을 이은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 사법부(경찰, 검찰, 판사, 변호사)는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정부에 비판적인 국민에 대해, 무고한 국민을 유죄로 처벌하고, 가벼운 죄를 범한 국민에게는 중벌을 과함으로써 사법부의 존재의미를 스스로 상실하였다.

이처럼 정치 법관들에 의한 사법농단은 박근혜의 하수인인 양승태의 사례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오래 동안 사법부에 의해 자행되어 온 적폐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할 적폐이고, 문재인 촛불정권에 이르러 사법 역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됨으로써 그 적폐를 개혁할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양승태와 더불어 각종 사법농단을 저지른 판사들의 숫자가 100여 명에 이른다 한다. 대법원장이 구속된 마당에 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용을 해주자는 흐름이 있는 모양인데, 차제에 이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모처럼 과거청산, 적폐청산을 하여 새 나라를 만들 기회를 무산시키는 것이며, 이는 역사의 소명을 다하지 않는 태만에 해당한다고 본다. 사법부에 대한 씻김굿이라고 생각하고, 이들 100여명의 국정농단 혐의가 있는 판사들에 대해서도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만이 다시는 참담한 과거의 역사가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86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천은 [사기]라는 불후의 저술을 남겼다. 사기 속에 법관이 지녀야 할 자세로 명심할 부분이 있어서 발췌해 소개한다.

[이이는 진나라 문공(재위 기원전 635년~627년) 때의 사법장관이다. 어느 날 부하가 적당히 아무렇게나 취조한 것을 그대로 믿고 죄 없는 사람을 처형하고 말았다. 뒷날 그 사실을 안 이이는 오판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고랑을 찬 채 자기를 사형에 처해 줄 것을 청원했다. 이에 문공은 이이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책임이라고 하나, 그 직분에 따라 책임은 달라진다. 이번 사건의 잘못은 부하에게 있는 것이지 그대의 죄가 아니다.”

“저는 사법관의 장으로서 그 권한을 부하에게 넘겨 준 일이 없습니다. 또한 많은 봉록을 받아 부하에게 나누어 준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판의 책임만을 부하에게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대에게 죄가 있다고 하나, 그렇다면 그대 위에 있는 나에게도 죄가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옵니다. 사법관에게는 사법관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여 형벌을 내렸을 적엔 자기도 그만한 형벌을 받아야 하며, 잘못해서 사형에 처했으면, 똑같이 사형에 처해져야 합니다. 제왕께서는 제가 어떤 어려운 사건도 올바로 재판할 수 있다고 저를 사법장관에 임명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어긋나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한 오판을 한 이상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이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양승태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100여 명의 법관들에게 말한다. 경찰, 검찰, 변호사, 그리고 나머지 모든 판사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에게 기원전의 인물인 이이처럼 살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법과 양심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고, 판결하고, 변론을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법을 자기 맘대로 판단, 농단하여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겠는가? 여러분의 양심이 시꺼멓다면 또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무려 40여 건이 넘는 죄목으로 기소된 양승태의 뻔뻔스런 모습을 보니 그의 양심이 시꺼멓다는 것을 알겠더라.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할 판사의 양심이 시꺼멓다면 그 동안 양승태에 의해 왜곡된 처분을 받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양승태와 그 일당들에 대한 엄중한 단죄만이 사법정의를 세우고, 나아가서 나라에 정의를 세워, 돈이 있든 없든, 배경이 있든 없든, 공정하게 함께 잘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첫발이 될 것이다!

브레이크뉴스 / 이재관 칼럼니스트 / green789@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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