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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소통

끝나지 않은 ‘100년 전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1-07 12:27
조회
38
끝나지 않은 ‘100년 전쟁’
주춤하는 진보, 반격 나선 보수…분수령 맞은 ‘주류교체 전쟁’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 맞은 올해
적폐 청산과 한반도 평화라는 두 기치로
정권의 명운 건 ‘역사전쟁’ 나서는 문 대통령

딸이 아주 어렸을 때 장난감을 사주었더니, “아빠, 오늘이 내일이야?”라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오늘이 오늘이지, 오늘이 왜 내일이야.” 조금 있다 또 묻는다. “오늘이 내일이야?” 이해하기 힘든 질문을 거듭 받고서야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제야 장난감을 사달라는 딸에게 “내일 사줄게”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딸에게 ‘내일’은 아빠가 장난감 사주는 날이었던 것이다.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해서 기억이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처지에서 봤다면 기억도 다른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인간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에게 사람의 기억이란 제멋대로 각색한 ‘각자의 왜곡’일 뿐이다. 그는 우리에게 영화 <북촌방향>에서 ‘일기를 쓰라’고 충고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카메라 광고 카피인 이 문장은 반박하기 어려운 진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본 대로’ 기록했다고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들은 대로’ 말했다고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는 공산주의, 북한과 싸워 온 전쟁의 기억이지만 반공주의와 싸워 온 역사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과 싸워 이긴 땀과 눈물의 기록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독재와 싸워 이긴 피의 기록이다.

같은 세대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인식도 공유한다. 6·25, 4·19, 5·18, 6·10 등과 같은 역사적인 날을 통해 1950년, 1960년, 1980년, 1987년을 기억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2018년 평창 올림픽과 같이 국가적 스포츠 행사로 기억하기도 한다.

응원하는 야구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해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작가들은 어느 소설이 발표된 해로 기억하고, 영화인들은 개봉된 영화를 중심으로 그해를 기억한다. 정치 컨설턴트인 나는 선거를 통해 기억한다.

알고 보면 모든 해는 다 ‘역사적’이다. 역사적 사건이 있었거나, 역사적 승리가 있었거나, 역사적 인물이 죽었거나, 역사적 회담이 있었거나, 역사적 기술이 태어났거나, 역사적 제도가 도입되었거나, 역사적 판결이 있었거나, 역사적 사고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역사를 기억한다.

2019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일 현충원 참배를 마친 뒤 방명록에 “대한민국 새로운 100년, 함께 잘사는 나라! 2019. 1. 2. 대통령 문재인”이라고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 지난해에도 새해 첫 공식 일정으로 현충원 참배를 마친 후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 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국정교과서’가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전쟁이었다면 ‘건국 100년’은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전쟁이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 두 분의 선대가 친일과 독재에 책임 있는 분들이다 보니 그 후예들이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이 이번 교과서 사태의 배경이고 발단”이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한국에서 이념전쟁은 끝나지 않은 ‘100년전쟁’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J R 실리가 통찰한 대로 “역사는 과거의 정치고, 정치는 현재의 역사”인 것이다.

9로 끝나는 해에 역사적 사건이 많은 나라는 중국이다. “1949년에는 사회주의가 중국을 살렸고, 1979년에는 자본주의가 중국을 살렸지만 1989년에는 중국이 사회주의를 살렸고, 2009년에는 중국이 자본주의를 살렸다”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1919년 고종, 1949년 김구, 1979년 박정희, 2009년 김대중·노무현 등 30년 주기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을 잃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전쟁에 발맞춰 더불어민주당도 ‘한반도 새 100주년 위원회’(가칭)를 가동하기로 했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벌이는 역사전쟁은 건국 이후 최초의 ‘주류교체’ 전쟁이다. 건국 이후든, 해방 이후든 주류교체는 (정권교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혁명적 사건이다. ‘이 나라는 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한 보수로서는 상상할 수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1년 전 이 지면의 첫 기고문 ‘주류교체전쟁’에서 한국 철학을 연구한 일본의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인용했다. “한국에서는 ‘리(理)’의 중추로부터 배제되는 쪽은 ‘리’를 장악하는 쪽에 의해 가혹하게 지배받는다. 그러므로 지금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가 벌이는 ‘리’의 쟁투는 대한민국 최초로 주류교체를 걸고 벌이는 진검승부다.

비주류의 선봉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두 개의 역사적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안으로는 ‘적폐청산’의 ‘리’를 들고 ‘대한민국 주류교체’라는 큰 전쟁을 치르고 있고,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의 ‘리’를 들고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생존싸움을 하고 있다.

이 정도의 전선을 동시에 맞은 대통령은 문재인이 처음이다. 둘 다 위험한 전쟁이다. 하나라도 패배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성공할까? 두 싸움 모두 국민적 지지가 관건이다.” “전례 없이 전력이 강화된 상대를 맞아 (김대중·노무현에게 정권을 빼앗겼을 때도) 주류였던 보수는 반격에 성공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정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대의명분인) ‘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보수의 사상·이념·비전·이론·정책이 국민의 동의를 잃고 있다. 매력 있는 인물도 없는데, 조직은 사분오열됐고, 메시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지역·이념·세대·계층의 전선에서 보수는 주류에서 비주류로, 상수에서 변수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의 기본적인 네 가지 전선, 즉 혁신 대 기득권, 새로움 대 낡음, 미래 대 과거, 통합 대 분열에서 보수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역사상 항상 비주류였던) 민주·진보 진영이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는 2018년 1월2일자 경향신문에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글을 기고했다. 국민의 80%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지지했고, 국회의원 234명이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고, 헌법재판관 8명 만장일치로 탄핵 인용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대세가 결정된 듯 보였다. 1년이 지난 2019년 현재 역사적 전쟁의 전황은 누가 유리한가?

촛불민심 업은 개혁의 골든타임은 지나고
지지율 하락에 국정 운영의 동력마저 약화
지리멸렬하던 보수는 “이때다” 다시 꿈틀…
내년 총선 앞두고 누가 승기 잡을까

만일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촛불민심과 탄핵의 주역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탄핵연대’를 ‘개혁연대’로 발전시켜 퇴행적 수구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고, 불가역적 ‘2017년체제’나 ‘2018년체제’를 통해 국민에게 약속했던 ‘새로운 대한민국’을 선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젠 늦었다. 개혁의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갔다. 새로운 체제는 오지 않았다. 비전도 없고, 전략도 없고, 리더십도 없었기 때문에 ‘탄핵연대’는 힘도 잃고, 길도 잃고, 꿈도 잃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국회 시무식에서 “개혁입법이 단 한 개라도 (처리)되긴 했나. (…) 대통령도 청와대도 심기일전해서 초심으로 돌아가 촛불의 절규와 함성과 소원이 담긴 그 뜻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읽어야 한다. (…) 국회는 민주주의의 꽃이고 마지막 보루다. (…) 국민을 대표해서 있는 게 국회고 촛불 든 1700만 국민을 대표해서 국회가 탄핵을 의결한 것이잖나. 국회가 없으면 가능했겠나. (…) 국회가 국회다워야 한다.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고 정부가, 사법부가 무시하면 이게 국회인가. 국민이 신뢰하는 기관 꼴찌가 국회인 게 문제”라며 탄핵의 국민적 에너지를 승화시키지 못한 대통령, 청와대, 국회를 싸잡아 비판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제는 ‘주류교체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 알 수 없다. 연말연시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찍지는 않았으나 문재인 정부는 과거 정권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새로운’ 지지층이 등을 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형성된 ‘보수동맹’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떨어져 나온 중도보수를 (민주·진보 진영 중심의) ‘신주류동맹’으로 편입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주류교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동맹을 강화시켜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핵심 지지층은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에서 ‘데드 크로스’를 호들갑스럽게 떠들지만 5년 단임의 대통령이 지지율 45% 정도를 유지한다면 레임덕이나 위기라고 할 수는 없다. 정권교체에 동의하는가? 야당이 대안인가? 두 질문 모두 50%를 넘는 동의가 없다면 정권의 위기는 아니다. 그리고 지금 야당의 모습으로는 두 질문 모두 50%를 넘기는 난망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모든 정권이 총선 1년여를 앞둔 시점에는 예외 없이 위기를 맞았다. 박근혜 정부도 2015년 초 2014년 11월에 터진 정윤회 문건 사건의 파장으로 당·청 관계가 최악이었다. 이명박 정부도 2011년 4월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가 물러났다. 그 뒤에 들어선 홍준표체제도 해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했다. 노무현 정부는 총선을 1년 앞둔 임기 첫해에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조기 레임덕에 빠졌다. 김대중 정부도 1999년에 터진 옷 로비 사건으로 특검 수사를 받으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지율 관리에 실패해서 40%가 붕괴하면 (총선을 앞둔 당에서) 청와대 쇄신론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정권의 기밀이 (언론과 야당으로) 새 나가면서 레임덕에 빠진다. 40% 붕괴는 대선 때 찍었던 사람들도 떠난다는 의미이므로 위기의 신호다. 지지율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대중이 대통령을 지지할 때는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다. ‘좋아하거나’ ‘필요하거나’ ‘상대가 싫거나’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이니”라고 부르는 강한 팬덤이 있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를 쉽게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야당이 지금과 같은 인식과 태도라면 야당이 싫어서 대통령을 지지하는 중도층도 꽤 있을 것이다. 팬덤 덕과 야당 탓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지율을 회복하려면 국정운영 방식과 메시지에 변화가 필요하다. 국민은 세 가지 기준으로 대통령이나 정부를 평가한다. ‘강한가’ ‘신뢰할 수 있는가’ ‘돌봐줄 수 있는가’다.

‘강한가’는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보를 믿고 맡길 수 있는가에 대한 평가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보수진영의 비판이 여전하고, 비핵화의 성과도 더딘 상황이지만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기대감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중도보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첫째, 지나친 기대감을 심어주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남북 이슈가 모든 이슈를 압도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한·미동맹의 균열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가’는 경제정책을 포함하여 문재인 정부가 제시하는 방향과 정책대로 가면 대한민국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에 대한 평가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낙제점이다. 문희상 국회의장 비판대로 말만 요란했지 개혁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했다. 일자리위원회·일자리수석·일자리전광판을 두면서 일자리정부를 강조했지만 실적은 민망하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꿔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거듭 설명하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하다.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과 정부는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지 선한 의도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돌봐줄 수 있는가’는 서민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얼마나 잘 들어주느냐에 대한 평가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차별화되는 이미지가 있었다. 겸손과 소통의 이미지는 (모든 권력이 그랬듯이) 집권 1년 만에 오만과 불통의 이미지로 서서히 변질되고 있다. (각본과 연출이 있는) 쇼와 이벤트로는 민심을 잡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과 2018년에 대한민국 주류교체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전략적 기회를 놓쳤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 앞에는 힘들고, 위험하고, 불확실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 만약 모든 난관을 뚫고 2020년 총선에서 압승하는 기반을 만들 수 있다면 2019년은 주류교체전쟁의 결정적 승리의 해로 역사에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다.

▶필자 박성민

[박성민의 정치 인사이드]주춤하는 진보, 반격 나선 보수…분수령 맞은 ‘주류교체 전쟁’.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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