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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소통

미약에서 창대로 나아간 "민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9-12 09:50
조회
65
30돌을 맞은 민변의 어제와 오늘

1988년 5월21일 토요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베어스타운 콘도에 50여 명의 변호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는 훗날 대통령이 된 노무현 변호사와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변호사도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청년변호사회(청변) 소속 변호사들이었다. 이날 행사는 이 두 조직이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 마련된 총회였으며, 이날 현재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탄생했다. 훗날 대통령 2명(노무현·문재인)과 수많은 정치인, 정무직 기관장을 배출한 국내 최대 진보 법조단체의 시작이었다.

‘인권 변론 필요’ 시대에 부응한 탄생

1980년대는 ‘인권 변론’에 대한 요구가 급격히 커지던 시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이뤄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던 때이자, 법조계에서는 인권변호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인권변호사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병린 변호사를 시작으로 이돈명(전 조선대 총장), 한승헌(전 감사원장), 조준희(전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 홍성우·황인철 변호사 등이 1970년대 유신 시기 시국사건 변론을 주로 담당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에 조영래·이상수·박성민·박원순 변호사 등이 ‘2세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1986년 5월19일 정법회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정법회에는 강신옥·고영구(전 국정원장)·유현석·이돈명·이돈희(전 대법관)·이해진·조준희·최영도·하경철(전 헌법재판관)·한승헌·홍성우·황인철·김동현·김상철·박성민·박용일·박원순·서예교·안영도·유영혁·이상수·조영래·하죽봉·박연철·박인제·박찬주·최병모·김충진 변호사 등이 참여해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를 통해 인권변론 활동을 확대해 갔다. 이들은 김근태 고문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평가받는 사건들을 맡아 변론하고 사회 쟁점화하는 데 노력했다. 정법회를 통해 변론 활동을 하던 중 회원인 이돈명·이상수·노무현 변호사가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 변호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을 피우나 싶었지만, 그해 대선에서 군부정권을 이어받은 노태우 정권이 수립되면서 젊은 변호사들의 민주화 움직임이 태동했다. 결국 1988년 젊은 변호사를 중심으로 ‘청년변호사회’(청변)가 탄생했다. 이 모임에는 이석태·김형태·조용환·유남영·박용석·임희택·손광운 변호사가 참여했고, 정법회 멤버였던 박원순·임재연·이원영·박인제·이양원·백승헌 변호사도 동참했다.

정법회와 청변은 각기 다른 모임으로 탄생했지만, 민주화를 위해 통합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몇 차례 논의를 거친 끝에 1988년 5월21일 현재의 민변을 창립하게 됐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민변’이란 이름이 탄생하기까지 수월하지는 못했다. ‘민주변호사회’ ‘민주변호사협의회’ 등 후보작이 나왔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조영래 변호사의 제안으로 현재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으로 결정됐다. 당시만 해도 ‘회(會)’자가 들어가지 않은 파격적인 작명이었다.

현재 검찰과거사조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갑배 변호사는 지난 5월 민변 창립 30주년을 맞아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조 변호사가 ‘지금은 여러분 귀에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앞으로는 우리말로 된 이런 이름을 자연스럽게, 많이들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독재 잔재와 싸우며 성장

민변의 활동은 창립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물렸다. 1980년대는 여전히 군부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고, 이에 대한 청산이 요구되는 때였다.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에서 민변은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았다.

민변은 출범하자마자 굵직한 사건을 연이어 맡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권인숙 성고문 사건 등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게 됐다. 또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사건,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건, 윤석양 보안사 민간인 사찰 양심선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도 변론했다. 사노맹 사건의 경우 은수미 성남시장이 과거 이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바 있기도 하다.

민변은 각종 사건 변론 외에도 권위주의 시대의 악법 개정과 진실 발견을 위한 노력에도 힘을 기울였다. 민변 창립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등 사회운동단체와도 협력해 양심수 석방 등 대외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노태우 정권이 지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변의 활동 폭은 더욱 넓어졌다. 1993년 안기부의 간첩 조작 사건 진상조사,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 저자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으며, 1995년에는 검찰의 5·18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함과 동시에 5·18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1996년 12월에는 여당의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표시로 변호사 철야농성을 벌이고 대국민 홍보책자인 《독재의 망령을 파헤치며》를 출간하기도 했다.

민변의 외연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회원 수가 300여 명으로 불었고, 역할 역시 독재 시절의 시국사건보다는 사회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진보적 법조인으로서의 역량이 필요하게 됐다. 또 이 시기부터 시민단체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외부와의 협력에 대한 필요성도 높아졌다.

상황이 변하면서 민변의 조직 체계에도 변화가 왔다. 민변은 주요 상임위원회로 공익소송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을 이석태 변호사로 선임해 김포공항 소음피해 소송, 흡연 피해자 집단소송, 수해 피해 주민들 집단소송 등 다양한 공익소송을 진행했다.

2002년 민변 회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민변의 활동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됐다. 또 민변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가 늘어나면서 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가 민변 내외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계기로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민주적 법 제도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높아졌다.

민변 출신 노무현 대통령 당선되며 개혁 박차

이 시기 민변은 독립적인 시민단체로서의 위상에 대한 내외의 우려에도 직면했다. 2004년 5월29일 충남 아산에서 열린 민변 제17차 정기총회는 민변의 ‘갈 길’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 자리였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 및 정무직 공무원은 회원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칙 개정안은 총회 소집 전부터 민변 내부를 술렁이게 했다.

직접적인 논란의 계기는 이라크 파병 문제였다. 이라크 파병안에 찬성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천정배 의원, 이종걸 의원 등을 제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논란이 커졌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민변 정부’ ‘변호사 참여정부’라는 외부의 비판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민변 신임 회장에 당선된 이석태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민변과 참여정부는 각자의 길을 갈 뿐”이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변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으로 전 국민적 촛불집회가 일어나면서 민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에 대해 10만 명을 국민청구인단으로 하는 헌법소원을 진행했다. 또 촛불집회 현장에서 인권침해 감시활동, 연행자를 위한 변호인 접견과 함께 국민을 위한 무료변론도 진행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변의 활동은 마치 1980년대로 돌아간 듯 맹렬했다. 2009년 용산참사 사건에 대한 변론활동, 2010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문제에 대한 유엔 진정활동을 했다. 2011년에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 희망버스 참여 및 변론, 한·미 FTA 반대 활동, 무상급식 주민투표 과정 참여, 일본 위안부 문제 등에 대응했다. 또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특위를 구성해 유가족을 지원하고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해 동조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2015년 제28차 정기총회에서 민변 회원은 1000명을 돌파했다. 민변은 여타 시민단체와는 다른 조직 구성을 가지고 있다. 민변 출신인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대부분 ‘민변 변호사’라 하면 단체에 속해 시민단체 활동가들처럼 움직이는 줄 안다. 하지만 민변은 세 명의 상근 변호사만 가지고 있을 뿐, 나머지 변호사들은 회원으로서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또 민변은 변호사 회원들에게 받는 회비로만 운영된다. 2008년 ‘촛불 소송 기금’ 등을 모으긴 했지만, 당시 민변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니까 회비만으로는 충당이 안 됐을 뿐”이라고 밝혔다.

2018년 5월, 민변은 창립 30년을 맞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4년 있었던 ‘민변 전성시대’란 지적은 또다시 반복되는 모양새다. 한 민변 회원 변호사는 “과거 민변이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지만, 현재는 정부와 적절한 긴장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민변 출신이 정치계와 관가에 많이 진출해 있어 오해를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민변 변호사는 “회원이 1000명을 넘어서면서 사회적 담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민변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과거보다 더욱 진일보한 법조단체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

유지만기자ㅣ redpill@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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