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최초의 민족자본가, 그가 남긴 '꿈'의 농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3-0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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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초의 민족자본가, 그가 남긴 '꿈'의 농장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발해농장' 사무실을 다녀오다

3.1절 연휴에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일으키고, 비밀결사조직 대동청년당을 결성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부산에 사시는 백산의 손자 안경하님을 모시고 중국 헤이룽장청(黑龍江城)으로 떠났다.

인천에서 하얼빈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 하얼빈에서 무단장시(牡丹江市)까지 급행열차로 두 시간, 무단장시에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둥징청진(東京城鎭)은 동북3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 시골마을이다.

대한제국 최초의 민족자본가로서 전 재산을 처분, 만주로 이주해 항일운동에 헌신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평생 실천한 백산 안희제 선생. 발해농장 사무실에서 그의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조선인의 꿈과 희망의 표상, 발해농장

발해농장은 백산이 1914년 부산에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던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이를 처분해 만든 곳이다. 그는 4남을 데리고 항일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하면서 3백여 가구 농업 이민의 터를 닦았다. 100만 평의 농지에 16km에 이르는 수로를 만들고 개간해 신화를 썼다.

발해농장을 세운 1932년부터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숨진 1943년까지 10여 년간 안 선생이 실천한 자작농창제는 이주 조선인의 꿈과 희망의 표상이었다. 백산 선생은 조선인들의 독립거점을 마련하여 임시정부 자금을 지원했고 항일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특히 만주국 치하에서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하던 시기에 발해농장은 민족자본가의 상상력으로 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되어 독립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백산은 김구, 이회영, 안창호 등 당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발해농장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발해농장 사무실 옆에 그가 1935년에 세운 발해소학교 학생 수가 한때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발해농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행한 현지인은 "모친이 발해농장 사무실에서 일했다"며 "모친 생전에 백산을 무척 존경했다"고 전했다. 그만큼 백산의 흔적은 아직도 뚜렷하다.

백범은 해방 후 백산의 얘기를 전해 듣고 백산의 묘지가 있는 곳을 향해 절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한때 백산이 경주 최 부자로부터 받아 백범에게 전해준 독립 자금 액수를 의심했는데, 해방 후 귀국해서 한 푼도 틀림없이 정확했음을 안 백범이 백산 선생의 가족에게 미안함과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 백산 안희제 등 조선의 300명 항일운동가 중 독립운동가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며 실천했고, 미래교육에 투자한 사람은 백산이라며 치켜세웠다.

발해농장은 현무암 지대여서 원래 밭이나 황무지였는데 백산이 인근 호수에서 40리 물길을 끌어와 수로를 만들어 논으로 바꾸는 대역사를 일구었다. 발해농장에서 생산된 쌀은 현무암 지반의 영향으로 맛이 뛰어났는데 백산은 이것까지도 계산한 듯하다.

민족자본가로서 백산 안희제는 항일운동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발해농장을 만들었다. 발해는 원래 우리 땅이었으니 농장 이름을 발해농장이라 정하고 광활한 발해의 부활을 꿈꾸었을 것이다.

일제의 탄압과 만주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백산이 꿈꾸던 광복과 발해의 꿈을 발해농장에서 되새기며 백산 선생의 꿈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3일간의 만주기행을 동행해준 내 벗이자 성공한 재중동포 사업가인 박용건 총재가 발해농장 기념관 건립에 벌벗고 나서겠다고 약속하니 벌써 설레인다. 항일독립군들이 말 달리던 만주벌판의 봄날이 더욱 따스하다.

글 : 국회의원 안민석 / 문화체육관광상임위원장
편집 : 김예지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