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그늘’에 기무사, 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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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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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낡은 관행과 적폐를 청산하고,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준수할 것입니다.”

영하 15도의 맹추위가 덮친 지난 1월 25일, 국립 현충원은 청록색 정복을 갖춰 입은 수 백 명의 군인들로 가득 찼다. 줄지어 선 장군들은 차례로 두 손을 냉수에 담갔다. 일명 ‘세심수’(洗心水), ‘마음을 씻는 물’이었다. 국군 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는 이 날 선언했다. “오로지 법과 규정에 입각해 보안방첩 부대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지겠습니다.” 군 첩보 기관이란 미명 아래, 권력의 비밀 호위무사를 자처해 온 지난날을 뒤로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기무사 주연의 공권력 범죄는 언제나 뒤늦게 드러난다. 지금 손을 씻는다 해도 과거가 끊임없이 발목을 잡고, 그래서 끊어내기가 힘들다. 민간인 사찰, 댓글부대를 동원한 여론 조작, 불법 선거개입도 모자라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기막힌 사실도 마찬가지. 이미 저지른 일을 주워 담을 수도,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조직이 그들이다. 보안사에서 기무사까지 무려 41년, 그들은 왜 숱한 고비에도 허물어지지 않았을까.

간첩 잡으며 ‘권력의 충견’으로

기무사의 ‘기무(機務)’란 ‘중요하고도 기밀한 정무’로 군사 보안과 방첩 업무를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군내 첩보기관이란 뜻이다. 1948년 조선 경비대 특별조사과로 출발한 기무사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순식간에 존재감을 불려 나갔다. 분단이 고착된 1960년대 정권의 제1과제는 대공 임무였고, 바로 그 임무를 담당하는 곳이 기무사의 전신인 ‘특무부대’와 ‘방첩부대’였던 덕이다. 도처에 간첩이 출몰하는 시대에 간첩 잡는 군인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자는 없었다.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특무대ㆍ방첩부’란 이름이 새겨진 메달이 지급되기도 했다. 여기에 새겨진 문구에서 당시 그들이 떨쳤던 엄청난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본 메달의 소지자는 시기 장소를 불문하고 행동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유신 정권에 이르러 육해공군에 흩어져 있던 보안부대가 1977년 ‘보안사령부’(기무사령부의 옛 이름)로 통합되자 위상은 정점을 찍었다. 정치 권력과 결탁하면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떨친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보안사는 권력의 충견에 다름없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또 다른 쿠데타를 두려워하며 풀어놓은 감시견이자, 불안한 권력을 지키기 위한 호위견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 보안사는 간첩의 동향보다 군내 주요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기에 골몰했다. 군내 통신망을 감청하는 것은 예사, 고위직 인사들을 타깃으로 대대적인 뒷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전방위에서 끌어 모은 정보들은 국방부 장관을 건너 뛰어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됐다. 최고 권력자를 제외한 그 어떤 권력도 끌어내릴 만한 막강한 힘이 쌓여갔다.

보안사는 권력의 속성을 가장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 배치된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수집해 올리는 고급 정보들 자체가 권력의 원천이었다. 그래서일까. ‘쿠데타 방지’라는 간판이 무색하게도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공백을 틈타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은 다름 아닌 20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21대 보안사령관 노태우였다. 대통령을 둘이나 배출한 보안사령관의 자리는 곧 출세의 발판이 됐다. 군사정권 시대에 비해 영향력이 떨어졌던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적잖은 기무사령관 출신들이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엿볼 수 있다’

보안사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불법 사찰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1990년 보안사 예하부대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폭로됐다. 독재 정권의 품에서 꾸준히 세를 불려 온 ‘보안사령부’가 ‘기무사령부’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을 갖게 된 이유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 입대한 윤씨는 고문에 못 이겨 동지들의 이름을 댄 후 괴로워하다 민간인 1300여 명을 사찰한 자료를 들고 탈영했다. 그가 공개한 ‘청명계획’에는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해 각계 야당 성향 인사를 감시한 기록뿐 아니라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 바로 체포할 민간인 리스트도 포함돼 있었다. 유사시 도주 가능 경로부터 친인척의 주거지까지, 미행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을 내밀한 개인정보였다. 여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 노태우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을 경질하고 이듬해인 1991년 보안사령부의 명칭을 ‘기무사령부’로 바꿨다. 개혁을 노린 정치적 메시지였지만, 간판을 바꾼다고 달라질 그들이 아니었다.

기무사의 ‘불법 사찰’ 본능은 보수정권의 귀환과 함께 망령처럼 살아났다. 2009년 기무사 소속 신 모 대위가 쌍용자동차 파업 농성 현장을 캠코더로 촬영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간 기무사가 민간인 사찰 행위를 계속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법원에 제출된 영상과 수첩 기록엔 ‘스토킹’을 방불케 하는 감시의 흔적이 빼곡했다. 8개월을 따라붙은 기록엔 피해자들이 신혼집을 알아보기 위해 빌라를 방문한 사실부터 아내와 함께 보낸 소소한 일상의 순간까지 적나라하게 담겼다. 2012년 대법원은 기무사 사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며 ‘1억 26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서울중앙지법의 원심을 확정했지만, 사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 피해자는 판결이 확정되기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렸다던 그의 휴대전화엔 지인은 물론 친한 친구의 번호까지 모조리 삭제돼 있었다. 직접 캠코더를 들었던 신 모 대위와 이를 지시한 이 모 대령은 처벌은커녕 피해자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요직을 향했다.

기무사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감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2011년 조선대 기광서 교수의 이메일 해킹 사건을 통해 더욱 공공연해졌다. 주로 경찰 전산망에서 주민등록번호, 주소, 출국정보, 범죄 경력을 조회해 온 기무사는 기 교수의 25년 전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을 포착하고 그의 조선대 포털 아이디를 해킹해 수 백 건의 이메일 자료를 절취했다. 군 검찰은 처음으로 기무사 압수수색을 요청했지만, ‘기밀 유출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청사 진입부터 가로막혔다. 기무사 내 경찰 전산망 단말기가 수 십 대인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기 교수 외에도 수많은 민간인들이 신원조회대상에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개인정보를 빼낸 경로는 경찰에 국한되지 않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을 통해 공단 전산망에 수록된 민간인 62명의 개인정보를 무단 조회했다는 사실이 줄줄이 확인됐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방식이 진화하기도 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사용이 확산되면서 소속 장병은 물론 군 미필인 남성의 개인 계정은 자연스럽게 ‘사찰의 대상’이 됐다. 집회 참여 경력과 게시글의 성향을 종합해 등급을 매긴 것은 물론, 가짜 계정을 통해 친구를 맺은 뒤 정보를 빼내면서도 ‘이미 공개된 정보이기 때문에 합법적’이라며 빠져나갔다.

지난 5월 17일 MB 정권에서 기무사를 이끌었던 배득식 전 기무사령관이 직권남용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배 전 사령관은 2011년 3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당시 여권 지지, 야권 반대 등 정치 관여 글 2만 여건을 온라인상에 게시하도록 기무사 대원들에게 지시한 혐의로 구속됐다. 연합뉴스

제 버릇 남 못 주고 ‘보수 정권 하수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 때 사라진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보고를 부활시킨 장본인이자,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를 댓글 부대의 ‘쌍두 마차’로 활용한 이다. 2008년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위기에 직면한 MB 정부는 기무사에 사이버 여론 보고와 댓글 공작을 지시했다. ‘스파르타 활동’으로 일컬어진 이 임무의 활동대원은 수백 여명. 전국 예하부대에서 차출된 중사와 대위들이 비는 시간마다 PC방을 방문해 지인의 명의로 댓글을 다는 식의 ‘게릴라성’ 활동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해진 직책이나 전담 영역 없이 유령처럼 활동한 이유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권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전방위적 노력은 사이버 공간에만 그치지 않았다. MB 정권에 우호적인 보수 단체를 물밑 지원하며 ‘맞불집회’를 열게끔 유도한 것 역시 기무사였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냥 하던 대로 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기무사는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보수단체를 결집하고 문재인 후보 캠프에 참여한 예비역 장성들을 사찰했다. 문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로 여론 조작을 펼친 건 빙산의 일각. 최근엔 기무사가 세월호 참사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문건이 공개되면서 세월호 유족들의 정치적 성향마저 감시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들은 팽목항은 물론 안산 단원고에도 배치돼 현장 상황을 일일이 보고했다. 심지어는 ‘떼를 쓴다는 비난 여론을 유가족에게 전달해 무분별한 요구를 차단하자’는 가이드라인부터 ‘시체는 바다에 가라앉히는 수장은 오랜 장례법이라는 점을 들어 인양을 좌절시키자’는 유가족 설득 방안까지 제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이미지 제고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희생자 이름을 부르라’고 조언한 것까지 드러나며 공분을 샀다. 그로부터 5일 뒤인 2014년 5월 19일 대국민 담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기무사의 제언을 충실히 따랐다.

기무사, 지금이 기회다

계엄령 문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인 지난달 30일 기무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윤광웅 국방부 장관 사이에 오간 통화내용까지 감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국방부 장관의 유선전화가 군용 전화였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도청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기무사는 ‘작전 수행’이라는 명분만 내걸면 법원의 영장 없이도 군내 통신망을 무차별적으로 감청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군의 댓글 공작 혐의를 자체 조사하고 있던 국방부 TF를 감청해 수사기밀을 미리 알아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무사의 광범위한 감청을 제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대에 뿌리내린 ‘감시 관행’이 문민정권 25년째인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온 이유는 하나다. 개혁의 요구가 번번이 좌절된 탓.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시도들이 이어졌지만, 누구도 기무사가 가진 권한 자체에 손을 대지 못했다.

2일 국군기무사령부 개혁위원회가 내놓은 기무사 개혁안은 요원을 30% 이상 감축하고,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보고를 금지하며, 전국에 배치된 기무부대를 전면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기무사를 재편해 새로운 사령부 형태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무사령 개정으로 조직의 힘을 빼고 다시 명칭도 바뀌게 된다. 군사 독재 시대의 잔재인 기무사에 ‘해체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절감한 조치다. 과연 27년 전 그랬던 것처럼 이름만 바뀌고 말 것인지, 그들이 다짐했던 것처럼 마음을 씻어내고 새롭게 태어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