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 골든타임 6개월 남았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5-14 10:30
조회
104
ㆍ경제민주화에 대한 시민사회 평가 낮아… 올해 안에 적극적 이행 촉구

‘적폐청산’을 내걸고 달려온 문재인 정부의 지난 1년은 기득권 해체와 청산작업을 벌여온 참여정부 초기 행보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인 ‘경제민주화’ 역시 참여정부의 경제분야 국정목표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와도 맞닿아 있다. 참여정부는 당시 ‘천지개벽’ 수준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보수야당과 재벌 등 기득권의 반발로 혼란을 겪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하소연할 만큼 경제분야에 대한 개혁작업은 녹록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역시 순탄치 않다. 재벌개혁을 비롯한 경제민주화의 구심점 역할을 맡겼던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보수야당의 공세 속에 중도 하차했다. 야당의 반발을 예견한 청와대는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김 전 원장을 임명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김 전 원장은 끝내 사임했다.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의 법제화도 요원하다. 집중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이 담긴 의원입법안도 이미 13개나 제출됐지만 보수야당의 반대로 국회에 발이 묶인 상태다.

“현 정부 기업정책, 대기업 중심”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면서도 시민사회의 기대치에 비해 아쉽다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 4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각 분야 정책전문가 3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못한 정책으로 일자리정책(47.8%)과 재벌정책(26.3%), 부동산정책(25.9%)을 꼽았다. 전문가뿐 아니다. 국민들도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이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4월 경제개혁연구소가 일반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7.8%가 현 정부의 기업정책이 대기업 중심이라고 답했다. 불과 3개월 전 설문조사에서 중소기업 중심(44.5%)이라는 답이 더 높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평가는 100점 만점에 20점 정도”라며 “국회 파행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특히 시민사회로부터 박한 점수를 받은 분야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재벌개혁’이다. 재벌개혁은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2017년 5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대 우선순위 개혁과제로 꼽힐 만큼 국민들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다. ‘재벌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김상조 교수가 공정거래위원장에 선임되자 여론은 정부 주도의 강도 높은 재벌개혁이 이뤄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자발적 개혁’ 카드를 꺼내들었다. 재벌기업들이 당면한 셀프개혁 이슈는 순환출자 해소, 금산분리, 일감 몰아주기 등 세 가지로 좁혀졌다. 자발적 개혁 요구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개선안 마련에 미적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김 위원장은 재벌기업의 개선안 마련이 지지부진할 경우 하반기 실태조사 등을 토대로 강한 제재와 규제 도입 등을 검토할 것을 ‘경고’했다.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지난 4월 11일 삼성SDI는 보유 중인 삼성물산 지분 404만2758만주를 5599억원에 매각 완료했다. 셀프개혁 이슈 가운데 순환출자 해소 부분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한 그룹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놨다. 총수 일가가 보유 중인 현대글로비스의 지분(2조원 상당)을 전량 기아자동차에 매각하고, 총수 일가는 대신 기아차 등이 보유 중인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인수, 기존 순환출자고리 4개를 모두 해소한다는 계획이다. 앞서 롯데그룹도 롯데지주회사를 출범하고 기존 50개의 순환출자구조를 13개의 순환출자구조로 단순화했다. 주요 재벌기업의 순환출자 문제 해소를 위한 움직임은 재벌 총수 일가의 편법적인 지배력 강화를 방지하고 투명한 지배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재벌의 순환출자 구조 개선은 당초 정부가 요구했던 ‘개혁’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선안에서 존속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하지 않고 법률적으로 모호한 ‘지배회사’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배회사 도입으로 현대차그룹은 금융계열사와 주력기업 중심의 계열사 정리를 하지 못했고, 지주회사 체계로 변화를 꾀하지 못했다. 현대중공업그룹도 지배구조 개선에 일종의 ‘편법’을 동원했다. 현대로보틱스라는 지주회사(현대중공업지주로 변경)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하면서 자사주를 지주회사에 배정해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높였다.

재벌의 ‘자발적 개혁’ 정부 요구에 미흡

재벌 2·3세들이 지배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공익재단’ 문제도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재벌 총수 일가는 계열사 주식 5%까지 증여세를 면제 받을 수 있는 공익재단에 계열사 주식을 출연한 후 재벌 2·3세가 재단이사장을 맡아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공익재단을 재벌 지배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이 공정위의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매각명령이 내려진 삼성SDI의 삼성물산 주식 200만주를 매입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편법행위다.

재벌 총수 일가들이 사익편취 도구로 쓰이는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방안도 반쪽짜리에 그친다는 비판이 나온다. LG그룹은 일감 몰아주기 시비 대상이었던 그룹 계열사 지흥에 대해서는 매각을 결정했지만 친족 재벌그룹인 희성그룹과 한국에스엠티에 대해서는 개선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현대글로비스의 일감 몰아주기 문제도 기아차와의 합병을 통해 공정거래법상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여전히 일감을 재벌그룹으로 몰아주는 모양새로 마무리됐다.

모회사와 주주가 자회사의 이사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제와 다중 장부열람권 도입, 대표소송제도 개선 등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각종 견제장치 마련 역시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상태다. 재벌개혁 공약으로 제시했던 횡령과 배임 등 경제범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과 사면권 제한도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법무부가 지난 4월에서야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 상법 개정안에 검토 의견을 담은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한 것도 늑장 행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남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부회장은 문재인 정부 1년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됐지만 경제민주화를 위한 담당 행정부처의 이행 로드맵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구체적인 입법안 제시나 국회 설득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라고 밝혔다.

‘재벌개혁에 대한 정부의 의지도 성과도 미흡하다’는 게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에 대한 시민사회의 평가지만 그렇다고 개혁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볼 수는 없다. 집권 2년차, 80%에 달하는 정부 지지율은 재벌개혁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기대다.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6월 지방선거 이후 연말까지가 이번 정권에서 근본적인 경제개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재벌개혁의 동력이 살아있는 지금 적극적인 이행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